종을 만드는 장인과 소리 없는 장마

옛날, 일 년 내내 구름이 드리운 푸른 산맥 기슭에 봉암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마을이 그런 이름을 갖게 된 까닭은 예전에 마을 어귀의 높은 공터에 서서 한마디 외치기만 하면, 소리가 산비탈을 타고 메아리친 뒤 사람이 대답하는 듯 맑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풀밭의 비탈진 곳들 사이에서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놀이를 즐겨 했다. 어른들은 먼 논밭으로 일하러 갔을 때 목소리만 내도 집 안에 누가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해, 이레 낮과 이레 밤 동안 폭우가 이어진 뒤 마을의 모든 소리가 갑자기 사라졌다. 산에서 물이 쏟아져 내려와 흙과 돌을 휩쓸고, 개울을 가로지르던 나무다리를 무너뜨렸다. 비가 그친 뒤, 마을 사람들은 닭 우는 소리도, 개 짖는 소리도, 절구질 소리도, 대숲 사이로 스치는 바람 소리도 더는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로 이야기하는 모습은 여전히 보였고, 가족들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도 보였지만,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모두가 그것이 홍수로 인한 일시적인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바나나 잎에 글을 써서 전하고, 손짓으로 의사를 표현하며 소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지나도, 침묵은 두꺼운 천처럼 마을을 계속 뒤덮었다. 사람들은 묻지 않아도 되고,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에 차츰 익숙해졌다. 아내는 남편에게 화가 나면 등을 돌리고 가 버렸다. 속상한 아이는 문을 닫아걸었다. 원래도 자주 하지 않던 미안하다는 말,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은 이제 더욱 드물어졌다.

한 번도 울리지 않은 종

마을 끝에는 이 지역 마지막 종 장인인 박 씨의 작은 주물 공방이 있었다. 그는 예순이 넘었고, 등이 약간 굽었으며, 손에는 화상 자국이 가득했고, 무엇이든 손대기 전에 늘 한참 동안 바라보곤 했다. 비가 내리기 전, 그는 마을 사당의 종과 산속 사찰들의 종, 그리고 처마 앞에 작은 종 하나를 걸어 두고 싶어 하는 부자들의 종까지 만들곤 했다.

소리가 사라진 날 이후에도 박 씨는 매일 아침 가마에 불을 지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풀무질을 하고, 뜨거운 금속을 틀에 부은 뒤, 종 하나하나가 식기를 끈기 있게 기다리는 모습을 보았다. 아무도 그가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소리가 없는 세상에서는 종이 울릴 수 없었다.

어느 날 오후, 안이라는 여자아이가 주물 공방을 찾아왔다. 안은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숲 가장자리의 집에서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아이는 눈이 밝았고, 다른 사람들이 흔히 지나치는 것들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었다. 안은 나무 조각에 이렇게 써서 물었다. “할아버지는 누구를 위해 종을 만들고 계세요?”

박 씨는 그 글을 읽고 숯막대기를 집어 땅바닥에 다시 썼다. “아직 들으려는 사람을 위해서란다.”

안은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썼다. “하지만 아무도 들을 수 없잖아요.”

박 씨는 미소 지었다. 가슴을 가리킨 다음 마을 바깥을 가리켰다. 그리고 땅바닥에 천천히 썼다. “귀로 들을 수 없다면 마음이 먼저 들어야지.”

안은 그 말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날부터 자주 그를 도왔다. 두 사람은 장작을 모으고, 틀을 만들 흙을 빻고, 홍수 뒤에 남은 낡은 구리 조각들을 골랐다. 박 씨는 금이나 은, 귀금속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이 종이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한때 이어져 있던 것들로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종의 틀 안에 죽집을 파는 할머니의 부러진 숟가락, 마을 이장의 일그러진 문고리, 농사를 짓는 한 가족의 쟁기 날 조각, 그리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 한 어머니가 차고 있던 구리 팔찌를 넣었다. 물건 하나하나에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들을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몇 줄의 글만 써서 그에게 건넸다.

침묵 속에서 잊힌 것들

종은 날마다 점점 커졌다. 그러나 종과 함께 마을의 불화도 커져 갔다. 이장은 박 씨가 금속을 낭비하고 있다고 여겼다. 쌀장수는 수레꾼이 쌀자루를 터뜨렸다고 원망했지만 말할 수 없어서 자루를 땅에 내던지기만 했다. 레 씨 집안의 두 형제는 개울가의 논 한 뙈기를 두고 다투며 나무판에 서로를 비난하는 글을 써서 집 앞에 세워 두었다. 누구도 상대방의 글을 끝까지 읽으려 하지 않았다.

안은 가장 두려운 것은 마을 사람들이 목소리를 잃은 일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마저 서서히 잃어 가는 것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면 사람들은 한 번의 눈길 속에 깃든 경멸을, 한 동작 속에 담긴 분노를, 반쯤 닫힌 문에 배어 있는 냉담함을 아주 쉽게 상상하게 된다. 말로 한 번도 표현되지 않은 것들이 점점 커지는 의심이 되었다.

어느 날 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안이 잠들어 있는데 외할머니가 심하게 기침하는 소리가 보였다. 아이는 박 씨의 집으로 달려가 도움을 청했다. 박 씨는 안의 입술을 보고 무슨 일인지 짐작한 뒤 등불을 들고 아이를 따라나섰다. 길은 미끄럽고 개울물은 높이 불어 있었지만, 두 사람은 마을 어귀에 있는 의원의 집으로 할머니를 제때 데려갈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안은 박 씨가 주물 가마 곁에 앉아 피로로 두 손을 떨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이는 이렇게 썼다. “어제 할아버지가 안 계셨다면 우리 할머니는 큰일 날 뻔했어요.”

박 씨는 고개를 저었다. 안을 가리킨 뒤 어두운 길을 가리켰다. 그리고 썼다. “나를 부른 건 바로 너란다.”

안은 멍하니 서 있었다. 아이는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박 씨는 여전히 아이의 뜻을 이해했다. 그 순간 안은 누군가를 부르는 일이 반드시 소리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매를 붙잡는 손일 수도 있고, 포기하지 않는 눈빛일 수도 있으며, 한밤중에 높이 들어 올린 등불일 수도 있었다.

종이 소리를 낸 밤

석 달이 지나 종이 완성되었다. 종은 반짝이지도 않았고, 화려한 무늬도 없었다. 종의 표면에는 여러 금속의 색이 뒤섞여 있었으며, 어떤 곳은 젖은 흙처럼 어둡고, 어떤 곳은 타오르는 숯처럼 붉었고, 어떤 곳은 개울 바닥의 돌처럼 옅은 회색이었다. 박 씨는 마을 사당 뜰 한가운데 세운 나무틀 위에 종을 올려놓았다.

마을 사람들이 보러 몰려왔다. 이장은 그에게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고 글로 물었다. 박 씨는 종을 매단 줄을 가리킨 다음 하늘을 가리켰다. 아무도 그 종에서 소리가 날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지만, 모두가 그가 종을 치려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날 밤, 달은 구름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박 씨는 안에게 줄을 당기라고 했다. 아이는 밧줄을 잡았지만 곧장 당기지는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마을 사람들이 서로 다른 무리로 나뉘어 서 있었다. 쌀장수는 수레꾼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레 씨 집안의 두 형제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죽집 할머니는 낡은 솥을 껴안은 채, 종의 몸체 속에서 녹아 버린 부러진 숟가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은 사당 뜰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나무판 하나를 가져와 큼지막하게 썼다. “각자 한 번도 말하지 못했던 것을 하나 떠올려 보세요.”

아무도 아이가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잠시 뒤, 죽집 할머니가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할머니는 어느 비 오는 날 수레꾼의 수레가 고장 났는데도 그가 자신의 죽 솥을 집까지 옮겨 준 일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썼다. 수레꾼은 그 글을 읽고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인 뒤, 할머니가 건네준 따뜻한 죽 한 그릇 값을 아직도 치르지 못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답글을 썼다.

레 씨 집안의 두 형제도 앞으로 나왔다. 형은 동생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논을 빼앗을까 두렵다고 썼다. 동생은 그 논이 어머니가 예전에 빈랑나무를 심었던 곳이기 때문에 지키고 싶을 뿐이라고 썼다. 글을 쓴다고 해서 다툼이 당장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처음으로 서로의 반대만 보는 대신 서로의 두려움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 한 사람씩 앞으로 나왔다. 어떤 사람은 사과의 말을 썼다. 어떤 사람은 감사의 말을 썼다. 어떤 사람은 세상을 떠난 가족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짧은 한마디만 썼다. 사당 뜰에는 울음소리가 없었지만, 많은 얼굴이 눈물로 젖었다. 침묵 속에서 진실한 마음은 모든 말보다 더욱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 사람이 나무판 앞을 떠나자, 박 씨는 안에게 줄을 당기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이는 온 힘을 다해 줄을 당겼다. 종이 흔들렸다.

처음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곧 발밑의 땅이 살짝 떨렸다. 나뭇잎들이 일정한 박자에 맞춰 흔들렸다. 물동이 속의 물이 동그란 물결을 이루며 일렁였다. 종의 몸체에서 낮고 깊은 소리가 퍼져 나왔다. 그것은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는 달랐고, 오랜 잠에서 깨어난 산이 숨을 내쉬는 소리와 같았다.

소리는 사당 뜰을 지나 비탈길을 타고 내려가 지붕에 닿고, 개울가를 스쳐 산비탈로 메아리쳤다. 마을 사람들은 종소리를 들었지만, 동시에 다른 소리들도 들었다. 대숲 사이로 스치는 바람 소리, 돌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소리, 마을 어귀의 집에서 들려오는 할머니의 기침 소리, 그리고 방금 되찾은 연 때문에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의 웃음소리였다.

아침이 되자 닭 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밖에서 개들이 짖었다. 어머니가 아이를 불러 밥을 먹으라고 했다. 마을 전체가 오랫동안 뒤집어 놓았던 항아리의 뚜껑이 이제 막 열린 것처럼 소리로 가득 찼다. 많은 사람들이 가족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서로를 끌어안았다.

늙은 장인의 가르침

그날 이후, 봉암 사람들은 다리를 다시 세우고 사당 뜰을 정비했다. 종은 가장 높은 곳에 매달렸다. 시간을 알리거나 악귀를 쫓기 위해서가 아니라, 듣는 사람이 진정으로 이해하려 할 때에만 소리가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일깨우기 위해서였다.

박 씨는 공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집집마다 걸 작은 종을 만들었다. 종을 건네기 전에는 언제나 너무 막힌 곳에 달지 말라고 당부했다. 종이 울리려면 바람이 필요하듯, 좋은 것들이 지나가려면 사람의 마음에도 열린 마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안은 주물 가마 곁에서 자라며 색깔로 금속의 뜨거운 정도를 알아보는 법을 배웠고, 아주 작은 몸짓을 통해 사람의 슬픔을 알아보는 법도 배웠다. 박 씨가 세상을 떠난 뒤, 안은 마을의 새로운 종 장인이 되었다. 누군가 다툴 때마다 안은 서둘러 중재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깨끗한 나무판을 건네며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과 가장 감사하게 여기는 것을 쓰게 한 뒤, 대답을 쓰기 전에 상대방의 글을 먼저 읽으라고 했다.

사람들은 사당 뜰의 큰 종이 여러 번의 장마를 지나서도 여전히 그곳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 안부를 묻는 것을 잊을 때면,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종은 저절로 흔들린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산과 숲의 기적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 종 안에 그날 밤 서로에게 진실했던 모든 사람들의 부르는 소리가 아직도 간직되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안은 종이 스스로 기적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종은 그저 사람들이 충분히 오래 멈춰 서서, 본래 바로 곁에 있던 것을 들을 수 있게 일깨워 줄 뿐이었다. 때로 한 마을을 벙어리로 만드는 것은 소리를 잃는 일이 아니라, 모두가 말하면서도 더는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는 일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