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냄새를 간직한 양철 상자

아버지의 오래된 집을 정리하던 날, 안은 빛이 바랜 손수건 더미 바로 뒤, 나무 장롱 맨 아래에서 양철 상자를 발견했다. 원래 과자가 들어 있던 상자로, 겉면에는 파란 꽃무늬가 인쇄되어 있었지만 페인트가 거의 다 벗겨져 있었다. 잠금장치도 없었고, 특별해 보이는 구석도 없었다. 안은 안에 보관해 둘 만한 서류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뚜껑을 열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뚜껑을 들어 올리는 순간, 오래된 종이의 퀴퀴한 냄새와 나무 냄새, 그리고 어딘가에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한 비 냄새가 느껴졌다.

안에는 네 겹으로 접힌 작은 종이들이 들어 있었다. 은행 계좌 서류나 계약서, 증명서는 하나도 없었다. 종이마다 이름 하나와 날짜, 그리고 짧은 몇 줄만 적혀 있었다. 어떤 종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골목 입구의 한 아줌마에게 우산을 돌려줄 것.” 다른 종이에는 “무이 할머니 댁 의자 다리 고쳐 드리기.”라고 적혀 있었다. 잉크가 번진 한 종이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304호 방 앞에 감기약을 놓아둘 것. 내가 줬다고 말하지 말 것.”

안은 바닥에 앉아 등에 장롱을 기대고, 아버지가 해 온 일들을 하나씩 전부 읽었다. 그 일의 수가 많아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한 번도 그 일들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살아 계실 때 안의 아버지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길모퉁이에서 자전거를 수리했으며, 아침이면 일찍 문을 열고 저녁이면 늦게 문을 닫았다. 누가 말을 걸면 대개 그저 웃거나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안은 한때 그 침묵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이 되어서야, 아버지는 자신의 말 대부분을 다른 일들을 하는 데 써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해지지 않은 것들

그 양철 상자는 안을 기억 속의 여러 오후로 되돌려 보냈다. 비가 내리기 직전이면 집에 노크 소리가 들리곤 했던 것을 안은 기억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재빨리 일어나 창고에서 우비나 손펌프를 꺼내 들고 나가곤 했다. 안이 어디에 가느냐고 물으면 아버지는 그저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단다.”라고 대답했다. 예전의 안은 그 대답이 못마땅했다. 아버지는 늘 남에게는 기꺼이 시간을 내주면서도 가족에게는 별로 시간을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 장의 종이에서 안은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십이 년 전, 안이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날에 쓰인 종이였다. 내용은 아주 짧았다. “란 선생님께 안이의 보충수업 자리를 맡아 달라고 부탁할 것. 아이가 묻기 어려워하니, 자기가 알게 하지는 말 것.” 그해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것을 안은 기억했다. 선생님이 자신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공부를 가르쳐 준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아버지가 그보다 먼저 선생님을 찾아갔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또 다른 종이에는 어머니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복도 전구를 갈아 끼울 것. 어두운 것을 무서워하지만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고 싶어 하지 않음.” 안의 어머니는 여러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평소 관절이 아파 걷기 힘들었지만, 좀처럼 불평하지 않았다. 안은 평소보다 복도가 더 밝았던 밤들과, 아버지가 말없이 전구 하나하나를 점검하던 모습을 기억했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단순히 전구만 갈아 끼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내의 아주 작은 두려움, 아내 자신조차 이름 붙이지 못했던 두려움을 눈여겨보고 있었던 것이다.

안이 읽어 내려갈수록 집은 점점 넓어지는 듯했다. 익숙한 물건들에는 어느새 또 하나의 기억이 덧입혀졌다. 문 옆의 낮은 의자는 아버지가 복권을 팔던 한 소년을 위해 다시 고쳐 만든 것이었다. 철제 옷걸이는 손을 다친 식료품 가게 주인을 위해 아버지가 만들어 준 것인지도 몰랐다. 현관 옆에 놓인 화분조차 안이 한 번도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품고 있을 수 있었다.

비 오는 날의 만남

그날 오후, 큰비가 쏟아졌다. 안이 양철 상자를 도시로 가져가려던 참에 한 중년 여성이 찾아왔다. 갈색 우비를 입고 천 가방을 든 여성이었다. 안을 본 여자는 혹시 자전거를 고치던 투 아저씨의 딸이냐고 물었다.

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자신을 행이라고 소개하며 골목 입구의 집에 산다고 했다. 투 아저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손주를 돌보느라 아직 조문을 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몇 마디 안부를 나눈 뒤, 그녀는 천 가방에서 오래된 우산 하나를 꺼냈다. 나무 손잡이는 오랜 사용으로 반들반들해져 있었다.

“이건 네게 돌려줘야 해.” 여자가 말했다.

안은 오래된 아버지 사진에서 보았던 우산임을 알아보았다. 왜 그 우산이 그녀의 집에 있었는지 묻자, 행은 여러 해 전 큰비가 내리던 날 시장에서 오도 가도 못 하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때 그녀의 남편은 막 세상을 떠났고, 자식들은 멀리 일하러 가 있었으며, 집에는 고열에 시달리는 아이까지 있었다. 안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우산을 건네고 빗속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여러 번 우산을 돌려주려 했지만, 아버지는 늘 그냥 가지고 있으라며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면 빌려주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그 우산으로 물이 불어난 길을 건너는 많은 사람을 도왔단다.” 행이 말했다. “누구 우산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의 것이라고 했지.”

안은 우산을 바라보았다. 천은 빛이 바랬고 우산살 하나가 조금 휘어 있었지만, 여전히 비를 막을 수는 있었다. 그제야 안은 아버지가 왜 작은 일들을 종이에 적어 두었는지 깨달았다. 아마 자신이 잊을까 봐 그랬을 뿐, 다른 사람들이 잊을까 봐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메모들은 선행이란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계속 이어져 갈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일깨우는 아버지 나름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재산의 모습을 하지 않은 유산

그날 이후에도 안은 양철 상자를 바로 가져가지 않았다. 그녀는 종이에 적힌 이름 중 아직 읽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한 명씩 전화를 걸었다. 어떤 사람은 아버지를 아주 또렷이 기억했고, 어떤 사람은 이야기를 알아듣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몇몇은 그저 작은 일이었고, 굳이 이야기할 만한 일도 아니라고 했다. 한 목수 아저씨는 안의 아버지가 가난한 손님 대신 품삯을 지불해 준 적이 있지만,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304호에 살았던 한 여자는 그날 밤 감기약이 친척이 잘못 보낸 선물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안은 아버지가 한 일들이 결코 업적 목록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들은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행해진 것도 아니었고, 받는 사람이 은혜를 갚도록 만들려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저 눈앞의 어려움을 보고 그것을 조금 덜어 줄 방법을 찾았을 뿐이었다. 누군가 우산을 필요로 하면 우산을 내주었다. 의자가 부서지면 의자를 고쳤다. 누군가 어둠을 무서워하면 전구를 갈아 끼웠다. 그는 인생의 모든 불행을 해결할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손이 닿는 곳에 있는 불행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 사실은 안으로 하여금 사람들이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우리는 흔히 눈에 보이는 것들을 센다. 집이 얼마나 넓은지, 통장에 얼마가 있는지, 한 사람의 이름 앞에 어떤 직함이 붙는지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보다 가치를 매기기 어려운 종류의 재산을 남긴다. 누군가가 덜 추웠던 저녁들, 누군가가 혼자 걷지 않아도 되었던 길들, 절망에 빠진 사람이 자신에게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기꺼이 도와줄 사람이 아직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순간들이다.

말없이 베푸는 일이 언제나 쉬운 것은 아니다. 선행을 하는 사람도 때로는 인정받고 싶고, 고맙다는 말을 듣고 싶으며, 자신이 한 일이 의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안의 아버지 이야기는 선의를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을 보여 준다. 선의란 무대 위의 공연이 아니라 말없이 이어지는 습관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곁에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차리며, 부끄러움 때문에 도움을 청하는 일을 포기하기 전에 행동하는 데서 시작된다.

다시 열린 양철 상자

도시로 돌아가기 전날, 안은 양철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종이 한 장을 더 적었다. 우산을 돌려주러 온 여자의 이야기와, 아버지가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던 이야기들, 그리고 자신의 침묵에 대한 오해를 깨달았을 때 느낀 감정을 썼다.

안은 아버지를 완벽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글을 쓴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성미가 급할 때도 있었고, 딸의 생일을 잊을 때도 있었으며, 다정한 말을 할 줄 몰라 어머니를 서운하게 한 적도 있었다. 한 사람의 삶에는 언제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뒤섞여 있다. 선행이 결점을 지워 주는 것은 아니며, 한 사람을 흠 하나 없는 우상으로 바꾸어 주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선행은 사람에게 부족한 점이 많더라도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 준다.

안은 상자 뚜껑을 닫았다가 다시 열었다. 그리고 결국 양철 상자를 오래된 집에 남겨 두기로 했다. 우산을 문 옆에 세워 두고, 현관의 화분을 손질한 뒤, 장롱 문 안쪽에 작은 쪽지를 붙였다. “필요하면 가져다 쓰세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건네주세요.”

다음 날 아침, 떠나기 전에 안은 이웃집 남자아이가 우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직 비는 오지 않았지만 구름이 골목을 가득 덮고 있었다. 아이는 그 우산이 투 아저씨의 것이냐고 물었다. 안은 그렇다고 대답하고, 집에 가는 길에 비가 오면 쓰라고 우산을 건넸다. 아이는 우산을 받아 몇 걸음 달려가다가 다시 돌아서 언제 돌려줘야 하느냐고 물었다.

안은 탁자 위의 양철 상자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말했다. “다른 사람이 더 필요로 할 때.”

그날 오후, 도시에 긴 비가 내렸다. 오래된 집에서 양철 상자는 여전히 장롱 맨 아래에 조용히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글쓴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지 알기 위해 누구도 읽을 필요 없는 쪽지들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골목 밖에서는 한 우산이 한 사람의 손에서 다른 사람의 손으로 건너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선의가 가장 오래 살아남는 방식일 것이다. 기억 속에 가만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비 오는 날들을 계속 지나가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