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없는 아침
작은 마을 끝자락에 푸른 기와지붕을 얹은 집이 한 채 있었고, 그곳에서 안은 외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집 뒤에는 그리 넓지는 않지만 언제나 온갖 소리로 가득한 정원이 있었다. 아침이면 참새들이 나뭇가지를 오가며 재잘거렸다. 한낮이면 작은 벌들이 꽃밭 주변을 날아다녔다. 저녁이 되면 처마 앞 박 덩굴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며 조용히 노래하는 듯했다.
안은 세상 어디보다 정원을 사랑했다. 안은 자주 할머니를 도와 채소에 물을 주고, 마른 잎을 줍고, 나무 밑동 주변의 흙을 일구었다. 외할머니는 모든 씨앗에는 저마다의 꿈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어떤 씨앗은 푸른 채소가 되기를 꿈꾸고, 어떤 씨앗은 꽃으로 피어나기를 바라며, 또 어떤 씨앗은 그저 자라서 다른 이에게 그늘을 드리우고 싶어 한다고 하셨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어느 날 아침, 안은 잠에서 깨어 잿빛으로 흐린 하늘을 보았다. 두꺼운 구름이 하늘 높이 가득 덮여 있었다. 처마 아래로 스며드는 햇살 한 줄기도 없었다. 늘 화사하던 정원은 갑자기 빛을 잃었고, 꽃봉오리들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듯 고개를 오므리고 있었다.
안은 집 한구석에 있던 낡은 나무 궤짝을 정리하다가 나무껍질로 만든 아주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에는 자물쇠가 없었고, 안에는 연한 노란색의 둥근 씨앗 하나만 들어 있었다. 안이 씨앗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자 이상하리만치 따뜻했다. 마치 그 안에 햇살 한 방울을 간직해 둔 것 같았다.
“할머니, 이 씨앗은 무슨 씨앗이에요?” 안이 물었다.
외할머니는 한참 동안 씨앗을 바라보다가 미소 지었다. “할머니도 이름은 모른단다. 네 외할아버지가 먼 여행에서 가져오셨지. 외할아버지는 이 씨앗이 씨를 뿌리는 사람이 온 마음을 다해 인내심을 가지고 돌볼 때만 싹을 틔우는 나무의 씨앗이라고 하셨단다.”
안은 곧바로 씨앗을 심고 싶어졌다. 울타리 옆의 부드러운 땅을 골라 작은 구덩이를 판 뒤 씨앗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흙을 덮고 물을 알맞게 주었다. 씨앗이 추울까 걱정된 안은 그 위에 큰 잎사귀 하나까지 덮어 주었다.
말없이 자라나는 나무
첫날이 지나갔지만 땅은 여전히 평평했다. 둘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사흘째가 되자 안은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안은 씨앗이 아직 그곳에 있는지 확인하려고 손가락으로 흙을 살짝 긁었다. 외할머니가 다급히 안을 막았다.
“계속 파서 확인하면 씨앗이 깨어날 시간이 없단다.”
안은 흙 두둑 옆에 앉아 애써 기다렸다. 안은 씨앗에게 마당을 뛰어다니는 병아리 떼 이야기와, 바람에 날려 지붕 위로 올라간 바나나 잎 이야기, 그리고 언젠가 아주 큰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일곱째 날, 작은 새싹 하나가 흙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너무 작아서 안은 가까이 몸을 숙여야만 볼 수 있었다. 새싹은 맑은 초록빛을 띠고 있었고, 끝에는 물방울 하나가 맺혀 있었다. 안은 너무 기뻐서 할머니를 부르러 달려갔다. 두 사람은 함께 구름이 잔뜩 낀 아침의 희미한 빛 속에서 새싹을 바라보았다.
그날부터 안은 한결같이 나무를 돌보았다. 물을 너무 많이 주지도 않았고, 빨리 자라라고 잎을 잡아당기지도 않았다. 비가 오면 빗물이 너무 많이 닿지 않도록 가려 주었다. 바람이 세게 불면 나무가 쓰러지지 않도록 곁에 대나무 막대기를 꽂아 주었다. 매일 안은 나무 곁에 잠시 앉았다. 재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은 나무가 건강한지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나무는 아주 느렸지만 확실하게 자랐다. 한 달이 지나자 안의 무릎 높이만큼 자랐다. 두 달이 지나자 둥근 잎들이 작은 손바닥처럼 펼쳐졌다. 놀라운 점은 하늘에 구름이 가득해도 잎이 여전히 따뜻한 황금빛으로 빛난다는 것이었다. 안이 잎 하나를 살며시 만질 때마다 잎 표면에는 햇살 가루 같은 작은 빛의 점이 나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신기한 나무에 대한 소문이 마을 전체에 퍼졌다. 아이들은 울타리 밖으로 몰려와 바라보았고, 어른들도 호기심에 찾아왔다. 모두가 나무가 아름답다고 칭찬했지만, 안은 늘 할머니의 말을 기억했다. “나무는 인내심을 가지고 돌보아야만 자란단다.” 그래서 안은 누구에게도 잎을 꺾거나 가지에 맺힌 빛의 점을 따 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유리병 속의 빛
어느 날, 마을의 도공 아저씨가 투명한 유리병 하나를 가져왔다. 아저씨는 나무 밑에 병을 내려놓고 안에게 떨어지는 빛의 점들을 받아 보라고 했다. 그날 밤, 잎사귀 하나가 살짝 흔들렸다. 작은 빛의 점 세 개가 잎 표면에서 떨어져 공중에 둥실 떠 있다가 유리병 안으로 내려앉았다.
유리병은 곧바로 부드러운 황금빛을 내뿜었다. 눈부실 정도로 밝지는 않았지만 마당 한구석을 환히 밝히기에는 충분했다. 안은 기뻐하며 병을 방 안으로 가져갔다. 그날부터 매일 밤 안의 방에는 작은 빛무리가 생겼다. 안은 책을 더 쉽게 읽을 수 있었고, 침대 밑에 떨어진 슬리퍼도 찾을 수 있었으며, 물을 마시려고 잠에서 깼을 때 더는 어둠 속을 더듬거리며 다닐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안은 정말 많은 빛을 받아 두면 마을에서 가장 큰 병을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안은 나무 밑에 병을 더 많이 놓았다. 매일 아침 빛의 점을 하나씩 세어 보고, 가득 찬 병들은 장롱 안에 넣어 두었다. 아이들이 빛을 조금만 나누어 달라고 부탁하면 안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내 나무야. 내가 매일 돌봤잖아.”
외할머니는 그 말을 들었지만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물으셨다. “장롱 속 병들이 방을 더 밝게 해 주고 있니?”
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말로 빛으로 가득 찬 병들 덕분에 방은 더욱 환해져 있었다. 하지만 창밖의 정원은 여전히 어두웠다. 울타리 옆 꽃밭은 햇살이 부족해 꽃을 피우지 못했다. 벌들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참새들도 더는 자주 내려오지 않았다.
안은 아직 할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빛을 아주 조심스럽게 간직하기만 하면 빛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원에 빛이 가장 필요했던 날
장마가 끝나 갈 무렵,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지붕 위를 세차게 가로질렀고, 나뭇가지 여러 개를 꺾어 쓰러뜨렸다. 다음 날 아침, 하늘은 캄캄하게 어두워져 있었다. 구름이 너무 낮게 내려와 대나무 꼭대기에 닿을 것만 같았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빛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정원은 고요했다. 꽃들은 꽃잎을 오므렸다. 채소들은 이리저리 기울어졌다. 어린 참새 한 마리가 바람에 둥지에서 떨어져 무궁화 덤불 아래에서 떨고 있었다. 안은 서둘러 낮은 가지에 있는 둥지를 찾으러 나갔지만,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안은 집으로 돌아가 빛이 담긴 병들을 가져왔다. 첫 번째 병을 마당으로 들고 나오고, 이어 두 번째 병과 세 번째 병도 가져왔다. 병 속의 빛 덕분에 길은 보였지만 정원 전체를 비추기에는 부족했다. 안이 어린 새 곁에 병들을 놓자 새는 떨기를 멈추고 낮은 가지 위로 뛰어오를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안은 울타리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마을 아이들이었다. 한 아이의 집은 물도랑 근처에 있었는데, 바람에 문짝이 떨어져 나갔다. 어떤 할머니는 마당에서 목도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지붕을 살피고, 부러진 나뭇가지를 치우고, 화분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해 빛이 필요했다.
안은 장롱 안에 남아 있는 병들을 바라보았다. 병들이 가득 차기를 기다리는 데 정말 많은 날을 보냈다. 그것들을 나누어 주면 자신의 방은 더 어두워질지도 몰랐다.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움직여야 했다.
안은 할머니가 던진 질문을 떠올렸다. “장롱 속 병들이 방을 더 밝게 해 주고 있니?” 그리고 말없이 자라난 나무도 생각났다. 나무는 빛을 자기만을 위해 간직하려고 잎을 펼친 것이 아니라, 빛을 받아들인 뒤 다시 내어 주기 위해 잎을 펼쳤다.
안은 장롱을 열었다.
안은 마을 사람들에게 병들을 나누어 주었다. 집집마다 작은 병 하나씩을 받았다. 가장 큰 병은 공동 마당에 놓았다. 부드러운 황금빛이 흙길 위로 퍼졌다. 어른들은 재빨리 문을 고쳐 달고, 쓰러진 나뭇가지를 세우고, 어린 새를 둥지 가까이 데려다 놓았다. 아이들은 함께 채소밭을 바람으로부터 가려 주었다.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안의 집에는 작은 빛의 병 하나만 남아 있었다. 방은 전처럼 환하지 않았지만, 마당에는 수많은 황금빛 점들이 정원을 밝히고 있었다. 이웃들은 병을 가져와 나무 밑에 둥글게 놓았다. 여러 병에서 나온 빛이 잎이 무성한 가지를 비추자, 나무 전체가 어두운 밤 한가운데 떠 있는 푸르스름한 황금빛 달처럼 보였다.
나무가 준 선물
다음 날 아침, 구름이 서서히 걷혔다. 첫 햇살 한 줄기가 정원에 내려앉았다. 꽃들이 꽃잎을 살짝 열었다. 벌들이 다시 날아왔다. 어린 참새도 혼자 힘으로 높은 가지까지 뛰어오를 수 있게 되었다. 모두가 기뻐했지만, 안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나무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꽃잎은 연한 노란색이었고, 가운데에는 반짝이는 작은 씨앗 하나가 들어 있었다. 안이 가까이 다가가자 꽃은 안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그 안의 씨앗은 하나가 아니었다. 아주 작은 씨앗이 아주 많이 들어 있었다.
외할머니는 그 씨앗들을 바라보며 말씀하셨다. “아마 나무는 네가 가장 중요한 것을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안은 씨앗을 가져다가 마을 곳곳에 여러 이랑을 만들어 심었다. 작은 친구들에게도 씨앗을 나누어 주고, 도공 아저씨에게도 나누어 주었으며, 이 나무가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한 뙈기의 땅을 돌보았다. 우물가에서 자라는 나무도 있었고, 학교 운동장에서 자라는 나무도 있었으며, 마을 입구 곁에서 자라는 나무도 있었다.
새로 난 나무들이 언제나 곧바로 빛을 내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나무는 더 많은 날을 필요로 했고, 어떤 나무는 바람을 더 잘 견뎠으며, 또 어떤 나무는 습한 땅을 좋아했다. 사람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각 나무에 알맞은 방법으로 돌보는 법을 배웠다. 병 하나가 가득 차면 자기 집에 따로 보관하지 않고, 마을 사람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곳에 놓았다.
안은 여전히 방에 작은 병 하나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무가 준 첫 번째 선물이었지만, 안은 더 이상 그것을 꼭 잠가 두어야 하는 물건으로 여기지 않았다. 병 속의 빛이 가득 차면 안은 그것을 창가에 놓았다. 바깥마당에서 누군가 필요로 하면 빌려 갔다가, 일이 끝나면 다시 돌려주도록 했다.
훗날 마을의 정원은 황금빛 잎을 반짝이는 나무들이 드리운 그늘로 유명해졌다. 하지만 안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나무들의 신비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주 단순한 한 가지를 깨달았다는 사실이었다. 선물은 제때 건네질 때 비로소 진정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 장롱 속에 간직된 빛은 방 하나만 비출 수 있지만, 나누어진 빛은 많은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도록 도울 수 있다.
어느 날 밤, 안은 창가에 누워 나무 그늘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소리를 들었다. 바깥에서는 빛의 병들이 차례로 길을 밝히고 있었다. 그 정원에서는 누구도 모든 빛을 자신만을 위해 간직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이 가진 따뜻함의 일부를 내어 주는 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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