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언덕 끝자락에 ‘햇살 정원’이라는 작은 정원이 있었습니다. 정원은 넓지 않았지만 언제나 색으로 가득했습니다. 아침이면 노란 국화꽃들이 햇빛을 맞으려 몸을 기울였습니다. 나무 울타리 곁에서는 보랏빛 꽃들이 바람에 살랑거렸습니다. 키가 작은 딸기나무에는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고, 민트 덤불은 누군가 곁을 지나갈 때마다 상쾌한 향기를 풍겼습니다.
정원을 돌보는 이는 봉이라는 토끼였습니다. 봉은 긴 귀와 구름처럼 하얀 털, 그리고 머리에 비해 조금 큰 밀짚모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봉은 식물을 아주 사랑했습니다. 매일 잡초를 뽑고, 흙을 갈고, 시든 잎을 주우며, 꽃밭 하나하나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봉은 식물들이 세심한 손길과 즐거운 마음으로 보살핌을 받으면 더욱 튼튼하게 자란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해에는 여름이 일찍 찾아왔습니다. 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리쬐었습니다. 언덕 아래의 시냇물은 점점 말라 갔고, 익숙했던 물웅덩이들은 사라졌으며, 하늘에는 며칠 동안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습니다. 햇살 정원의 흙에는 작은 금이 생겼습니다. 잎사귀는 더 이상 싱그럽고 푸르지 않았고, 꽃잎은 바람에 뒤집힌 작은 우산처럼 오므라들었습니다.
봉은 매일 아침 물뿌리개 두 개를 들고 우물로 갔습니다. 몇 번이고 오가야 했지만 우물에는 물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봉은 물을 아주 공평하게 나누어야 했습니다. 모든 식물이 조금씩 물을 받았지만, 배불리 마실 수 있는 식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늘 당장 비가 내리면 좋을 텐데.” 봉이 한숨을 쉬었습니다.
봉은 맑고 투명한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잿빛 구름도,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소리도 없고, 봉은 그저 너무 넓은 푸른 하늘을 보며 마음이 텅 빈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무 상자 속 작은 씨앗
어느 날 오후, 정원 뒤편의 오두막을 정리하던 봉은 오래된 나무 상자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상자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고 뚜껑 위에는 마른 잎 하나가 놓여 있었습니다. 봉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깨끗이 닦은 뒤 열었습니다. 안에는 동그랗고 작은 씨앗들이 많이 들어 있었습니다. 갈색 씨앗도 있었고, 연한 노란색 씨앗도 있었으며, 꿀방울처럼 반짝이는 씨앗도 있었습니다.
상자 옆에 놓인 오래된 종이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무지개 나무의 씨앗. 인내심으로 보살피는 곳에 심을 것.”
봉은 너무 기뻐서 하마터면 상자를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무지개 나무가 자라면 정원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봉이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 나무의 꽃들이 더운 날에 모두를 기분 좋게 해 줄 수도 있겠지.”
봉은 울타리 옆의 작은 땅을 골랐습니다. 흙을 아주 부드럽게 갈고, 돌멩이를 모두 주운 다음 씨앗 세 개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얇게 흙을 덮고 물을 조금 주었습니다.
다음 날, 봉은 곧장 그곳으로 달려가 보았습니다. 땅은 여전히 평평하고 잠잠했습니다.
그다음 날에도 땅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사흘째가 되자 봉은 조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막대기를 가져와 흙을 찔러 확인하려 했지만, 곧 황급히 손을 거두었습니다. 씨앗이 뿌리를 내리려면 가만히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기다리자.” 봉은 스스로에게 다짐했습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친구들
그날 오후, 갈색 다람쥐가 정원을 찾아왔습니다. 다람쥐는 도토리 주머니를 들고 있었고, 눈은 언제나 호기심으로 반짝였습니다.
“여기에 뭘 심은 거야?” 갈색 다람쥐가 물었습니다.
“무지개 나무의 씨앗이야. 아주 특별한 나무라고 들었어.”
갈색 다람쥐는 땅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아직 안 자랐으면 파서 확인해 봐. 씨앗이 상했을지도 모르잖아.”
“안 돼.” 봉이 말했습니다. “종이에 인내심으로 보살펴야 한다고 쓰여 있었어.”
갈색 다람쥐는 어깨를 으쓱했습니다. “나는 기다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 무슨 일인지 알고 싶으면 열어 보는 게 제일 빠르지.”
그 말을 남기고 다람쥐는 달려갔고, 작은 길에는 딸기나무 잎 하나만 남았습니다.
다음 날에는 가시 고슴도치가 찾아왔습니다. 고슴도치는 아주 작은 도자기 물병을 들고 있었습니다.
“나무가 자라려면 물을 아주 많이 줘야 해.” 고슴도치가 말했습니다. “물이 많을수록 좋아.”
봉은 남은 물병 두 개를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우물에는 물이 얼마 남지 않았어.”
“그럼 씨앗에 전부 몰아줘. 다른 식물들은 이미 다 자랐으니 아마 스스로 알아서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봉은 축 늘어진 국화꽃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자신과 함께 수많은 햇볕의 계절을 견뎌 온 식물들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습니다.
닷새째 되는 날, 참새가 날아왔습니다. 참새는 울타리 기둥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습니다.
“구름 한 무리가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는 소리가 들렸어. 아마 오늘 밤에는 비가 올지도 몰라.”
봉은 고개를 들어 기뻐하며 물었습니다. “정말?”
“확실하지는 않아. 바람이 그렇게 말했지만, 바람도 가끔 틀리거든.”
그날 밤, 봉은 오두막 문 앞에 앉아 첫 빗방울을 기다렸습니다.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벌레들이 웅웅거리는 소리는 들렸지만, 하늘은 여전히 잠잠했습니다. 구름은 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햇빛은 다시 언덕 위에 황금빛으로 펼쳐졌습니다.
봉은 슬펐습니다. 자신이 너무 많이 기대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보는 일은 물을 주는 것만이 아니다
정원을 살피던 중 봉은 큰 잎 하나가 씨앗을 심은 땅을 완전히 가리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봉은 조심스럽게 잎을 옆으로 옮겼습니다. 또 땅 표면 가까이에 작은 돌멩이 몇 개가 놓여 있는 것도 발견하고, 흙이 더 잘 숨 쉴 수 있도록 돌멩이들을 한데 모았습니다.
오후가 되자 봉은 마른 나뭇가지로 낮은 지붕을 만들었습니다. 그 지붕은 땅이 너무 뜨거워지는 것을 막아 주면서도 햇빛은 통과시켰습니다. 봉은 어린 식물들의 뿌리 주변에 짚을 깔아 약간의 수분이 남아 있도록 했습니다. 민트 잎을 갉아 먹고 있는 애벌레를 발견했을 때에는 다치게 하는 대신 정원에서 멀리 옮겨 주었습니다.
봉은 여전히 물을 주었지만, 천천히 고르게 주었습니다. 물을 한꺼번에 쏟아붓지 않았습니다. 나무 밑동에 조금씩 물을 붓고 흙이 스며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물을 부었습니다. 남은 물은 큰 잎에 묻은 먼지를 닦는 데 사용했습니다.
날이 지나도 정원이 곧바로 다시 푸르러지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아침에는 새로 돋아난 잎 몇 장만 보였습니다. 어떤 오후에는 오래된 꽃 한 송이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봉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정원을 돌본다는 것은 모든 것을 즉시 바꾸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인내심을 가지고 해 나가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갈색 다람쥐는 정원에 점점 더 자주 들렀습니다. 어느 날에는 울타리를 만들 작은 나뭇가지를 가져왔습니다. 가시 고슴도치는 봉이 나무 밑동 주변의 흙을 북돋는 일을 도왔습니다. 참새는 마른 풀을 찾아 날아다니다가 그것을 가져와 꽃덤불 아래에 깔았습니다.
“기다리는 것도 그리 지루하지만은 않은 것 같아.” 갈색 다람쥐가 나뭇가지를 땅에 꽂으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봉이 대답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뭔가 할 수 있어.”
땅속의 초록 새싹
열흘째 되는 날, 갈색 흙 사이로 작은 초록빛 줄무늬가 나타났습니다. 봉은 해가 막 떠오를 무렵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봉은 새싹이 휘어질까 봐 손대지 못한 채 한참 동안 그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싹이 났어!” 봉이 크게 외쳤습니다.
갈색 다람쥐와 가시 고슴도치, 참새가 함께 달려왔습니다. 셋은 아주 작은 새싹을 기적이라도 바라보듯 바라보았습니다. 이제 아무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소리에 새싹이 놀랄까 봐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며칠 동안 새싹은 조금씩 자랐습니다. 가느다란 줄기와 연한 초록색의 첫 잎 두 장이 생겼고, 세 번째 잎은 꼭 쥔 손처럼 둥글게 말려 있었습니다. 봉은 어린 나무가 바람에 기울지 않도록 곁에 막대기를 하나 더 세워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아침, 모두가 마른 잎을 줍고 있을 때 산 쪽에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바람에는 촉촉한 흙 냄새가 선명하게 실려 있었습니다. 참새는 하늘 높이 솟아올랐습니다.
“구름이 오고 있어!” 참새가 노래하듯 외쳤습니다.
이번에는 아무도 너무 일찍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봉은 계속 나뭇가지를 묶었고, 갈색 다람쥐는 물건들을 오두막 안으로 옮겼으며, 가시 고슴도치는 물이 꽃밭을 넘쳐 흐르지 않도록 작은 물길들을 점검했습니다. 그들은 희망에는 준비가 함께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저녁이 되자 잿빛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었습니다. 물방울 하나가 봉의 밀짚모자 위로 떨어졌습니다. 이어 두 번째 물방울, 세 번째 물방울이 떨어졌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에 비가 쏟아졌습니다.
꽃들은 꽃잎을 들어 올렸습니다. 잎사귀들이 살랑거렸습니다. 마른 흙은 물을 마시며 은은하고 부드러운 향기를 내뿜었습니다. 봉은 빗속에 서서 활짝 웃었습니다. 뺨을 타고 물이 가득 흘러내렸지만, 그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봉 자신도 알 수 없었습니다.
온갖 빛깔을 품은 꽃
비가 내린 뒤, 정원은 날마다 달라졌습니다. 무지개 나무는 봉의 무릎보다 더 높이 자랐습니다. 줄기에는 작은 꽃봉오리가 많이 맺혔습니다. 어느 이른 아침, 첫 꽃봉오리가 피어났습니다. 꽃잎은 저녁노을처럼 따뜻한 붉은색이었고, 가장자리는 연한 노란색이었으며, 꽃 한가운데에는 아주 작은 푸른 점들이 있었습니다.
다음 날에는 꽃 한 송이가 더 피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꽃, 네 번째 꽃도 피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지개 나무는 여러 빛깔의 꽃으로 가득 덮였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 전체가 웃는 것처럼 살랑거렸습니다.
봉은 꽃을 한 송이도 꺾지 않았습니다. 대신 나무 곁에 작은 나무 의자를 하나 놓아 숲속 친구들이 앉아서 구경할 수 있게 했습니다. 갈색 다람쥐는 도토리를 가져와 나누어 주었습니다. 가시 고슴도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참새는 다른 새 친구들도 많이 불러와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함께 들었습니다.
정원이 아름다워진 것은 무지개 나무가 생겼기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함께 정원을 돌보았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워졌습니다. 오래된 꽃밭들은 점차 회복되었습니다. 어린 식물들은 햇빛을 가릴 수 있게 보호받았습니다. 물길은 깨끗하게 유지되었습니다. 모든 동물은 작은 일이라도 꾸준히, 함께 해 나가면 큰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름이 끝날 무렵, 무지개 나무에는 씨앗으로 가득 찬 작은 열매들이 맺혔습니다. 봉은 씨앗을 나무 상자에 모았지만, 모두 자신만을 위해 간직하지는 않았습니다. 갈색 다람쥐와 가시 고슴도치, 그리고 숲속 친구들에게 씨앗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너희가 사랑하는 곳에 이 씨앗들을 심어.” 봉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꼭 기억해. 씨앗은 바라는 마음만으로 자라지 않아. 좋은 흙과 알맞은 물, 보살핌, 그리고 시간이 필요하단다.”
갈색 다람쥐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가시 고슴도치는 미소 지었습니다. 참새는 정원 주위를 빙빙 날며 큰 소리로 노래했습니다.
그때부터 봉은 어떤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아 조급해하는 이가 있을 때마다 그들을 무지개 나무 곁으로 데려갔습니다. 봉은 땅속 깊이 뻗은 뿌리를 가리키며, 초록 새싹이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씨앗이 어둠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묵묵히 일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숲속의 모든 이들은 한 가지를 기억했습니다. 아름다운 일들 중에는 우리가 이름을 불렀다고 해서 곧바로 찾아오는 것이 있다는 법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돌보고, 준비하며, 중간에 포기하지 않는다면 꽃이 피는 날은 반드시 저마다의 방식으로 찾아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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