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신앙: 선과 악, 그리고 깨달음에서 광신으로 이르는 길

종교적 신앙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현상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수많은 문명보다 먼저 존재했고, 수많은 제국의 흥망을 지켜보았으며, 오늘날까지도 문화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는 삶의 의미를 찾고, 정신적 의지처를 구하며, 고통의 이유를 이해하고, 도덕적 지침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가장 신성한 영역에서도 때때로 어둠이 스며든다. 동일한 신앙이 평화를 건설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잘못 사용되거나 오해될 경우 파괴의 불꽃이 되기도 한다.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라는 세 종교는 모두 인류 사회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역사에는 이들 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비극, 갈등, 폭력의 기록 또한 남아 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은 자비와 지혜를 실천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극단주의로 치닫는가? 왜 선을 가르치는 종교가 악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는가? 그리고 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종교의 뿌리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채, 조작된 주장과 거짓된 신념을 믿게 되는가?

이 문제는 단지 역사적 질문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정신적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인터넷 시대의 허위 정보, 음모론, 종교적 왜곡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종교적 신앙의 긍정적 측면: 도덕의 기반과 정신적 힘

원시 시대부터 인간은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묻곤 했다. 종교는 그러한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으로 탄생하여 윤리의 틀을 제공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더 바람직한 삶의 방식을 제시해왔다.

불교에서 부처의 가르침은 지혜와 자비에 의한 해탈을 강조한다. 부처는 강요하거나 벌하지 않았고, 다만 스스로 깨달음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했을 뿐이다.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아쇼카 대왕은 참혹한 칼링가 전쟁 이후 불교에 귀의하여 폭력을 버리고 평화 정책을 시행했다. 그의 조서는 종교가 정치와 사회를 어떻게 선한 방향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기독교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중심으로 약 2000년 동안 서양 윤리의 기초를 형성했다. 중세의 자선 운동, 가난한 자를 위한 돌봄, 병원의 설립, 그리고 근대 인권 사상까지 기독교적 사랑의 정신이 깊게 스며 있다. 성 프란치스코와 같이 오직 사랑과 헌신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 인물도 많다.

이슬람교의 타우히드(유일신 사상)는 신자 간의 평등을 강조한다. 8세기에서 13세기 사이 이슬람 문명은 황금기를 맞이하였고, 바그다드와 코르도바 등은 세계 최고의 학문 중심지로 성장했다. 의학, 수학, 천문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이 이루어졌으며, 초기 이슬람 병원과 도서관은 유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종교가 올바르게 이해될 때, 그것은 사회를 풍요롭게 하고 문명을 전진시키는 힘이 된다.

종교가 악의 도구로 변할 때: 신앙이 권력의 무기가 되는 순간

종교의 비극은 가르침 자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에게서 발생한다. 종교는 정치적, 영토적, 이념적 목적을 위해 조작될 때 위험한 힘을 갖게 된다.

십자군 전쟁(1096–1291)

“성지를 해방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정치적·경제적 이해가 얽힌 전쟁이었다. 십자군은 이슬람교도뿐 아니라 유대인, 심지어 동방 정교회 기독교인들까지 학살했다. 신앙은 전쟁의 정당화 도구가 되었다.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1947)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의 갈등은 정치적 선동으로 폭발했다.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되고, 1,400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종교 정체성이 공포와 증오의 불씨로 이용된 비극적인 사건이다.

스리랑카의 불교 민족주의

비폭력을 가르치는 불교조차 일부 민족주의 단체에 의해 타밀족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된 적이 있다.

이처럼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그 종교를 이용하는 인간의 마음에 있다.

왜 종교는 쉽게 악용되는가?

불안과 위기 속에서 인간은 절대적인 진리를 갈망한다. 종교가 ‘절대적 진리’로 간주되면, 권위자는 이를 이용해 대중을 조종하기 쉽다. “신의 뜻”이라는 말은 개인의 도덕적 판단을 마비시키곤 한다.

종교 공동체의 강한 결속력도 때로는 “우리 vs. 그들”이라는 위험한 구도를 형성한다. 종교가 민족주의와 결합하면 갈등은 더욱 심화된다.

또한 경전이 잘못 해석되거나 의도적으로 왜곡되는 문제도 크다.
이슬람의 ‘지하드’는 원래 자기 안의 악과 싸우는 내면적 수행을 의미하지만, 극단주의자들은 이를 전쟁의 의미로 바꾸어버렸다.
중세 기독교의 ‘이단 심문’도 종교보다는 정치적 목적이 강했고,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됐다.
심지어 불교에서도 ‘무아’의 개념이 잘못 해석되어 맹목적 복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 사례가 있다.

왜 사람들은 광신에 빠지고, 조작된 주장을 믿게 되는가?

심리적 요인, 교육 수준, 사회 환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복잡한 문제에 단순한 답을 원한다. 공포를 자극하거나 구원을 약속하는 허구의 가르침은 빠르게 퍼진다. 광신자들은 종교 자체보다 특정 지도자의 말에 더 의존한다.

역사적 이해의 부족도 문제를 키운다.
이슬람을 폭력적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은 그 황금기의 학문적 성취를 모른다.
불교가 항상 평화적이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일본의 일부 승려들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국주의를 지지했던 사실을 모른다.

무지는 거짓이 침투하는 틈을 만든다.

사회가 불안정할수록 예언, 음모론, 종말론이 유행한다. 중세 유럽의 흑사병과 기근 속에서 가짜 예언자가 등장했듯, 오늘날 인터넷은 이러한 현상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올바른 신앙과 광신을 가르는 역사적 사례

1995년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을 일으킨 옴 진리교는 불교·밀교의 요소를 왜곡해 테러를 정당화했다. 이것은 본래 불교의 가르침과 전혀 무관하다.

스페인 종교재판에서는 종교적 이유보다 정치적 목적이 앞섰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처형되었다.

이슬람의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도 본래는 정치적 지도자 계승 문제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종교적 갈등으로 확장된 것이다.

이 모든 사건은 다음 사실을 보여준다.
폭력을 만드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이용하는 인간이다.

신앙의 뿌리로 돌아가는 것의 중요성

광신자 대부분은 자기 종교의 기원을 거의 알지 못한다.
부처는 자유로운 사유를 강조했지만, 광신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신앙을 강요한다.
예수는 사랑을 가르쳤지만, 그의 이름으로 전쟁이 벌어졌다.
꾸란은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극단주의자들은 폭력으로 지배하려 한다.

가르침의 본질이 잊혀질 때 종교는 빛이 아니라 무기가 된다.

종교를 다시 선한 길로 이끄는 방법

극단주의의 해독제는 교육과 지혜이다.
인도의 타고르, 서구의 계몽사상가들, 현대 이슬람 학자들 모두가 종교를 인간성과 이성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려고 노력해왔다.
종교는 지배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야 한다는 공통된 메시지가 있다.

결론: 악을 만드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인간이다

종교는 칼과 같다.
빵을 썰 수도 있고,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

부처, 예수, 무함마드는 모두 자비와 사랑, 정의를 가르쳤다.
그러나 역사 속에는 그 가르침이 왜곡되어 수많은 비극을 낳은 사건이 존재한다.

십자군 전쟁, 현대 테러, 스리랑카의 종교 갈등, 도쿄 사린가스 사건…
이 모든 사건은 다음 진실을 말해준다.

종교가 위험해지는 순간은 사람들이 그 뿌리와 본래의 가르침을 잊어버릴 때이다.
신앙이 눈멀면, 종교는 파괴의 무기가 된다.

종교는 악이 아니다.
그것을 선하게 만드는 것도, 악하게 만드는 것도 결국 인간의 이해, 자비, 그리고 지혜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