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흙길 끝, 드문드문 서 있는 집들과 언덕 아래까지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있는 곳에 한때 바이맛 마을이라 불리던 마을이 있었다. 그 이름은 마을 주위를 흐르는 작은 강에서 비롯되었다. 예전에는 강물이 사시사철 가득했고, 강물 표면은 햇빛 아래 반짝였으며 강둑의 대나무 숲은 몸을 기울여 물에 비친 모습을 비추곤 했다. 마을 사람들은 벼와 콩, 옥수수를 재배했다. 수확철이 되면 집집마다 마당은 황금빛 볏짚으로 가득했고, 갓 수확한 곡식 냄새가 향긋했다.
그러나 어느 해 가뭄이 닥쳐왔다. 처음에 사람들은 그저 평소보다 조금 긴 더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우물은 점점 말라 갔고, 논바닥은 깊은 금이 갈라졌다. 계절의 중반이 되자 강에는 드문드문 흩어진 몇 개의 탁한 물웅덩이와 하얀 모래 띠만 남았다. 벼는 이삭을 피울 틈도 없었다. 콩밭은 햇볕 아래 그을려 타들어 갔다. 마을 전체가 고요해졌다. 닭 울음소리마저 뜸해졌고, 맷돌은 더 이상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안이라는 소녀가 살고 있었다. 안은 강가의 작은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안의 아버지는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고, 평년에는 두 모녀가 살아가기에 충분한 크지 않은 논 한 마지기를 남겼다. 안은 부유하지도 않았고, 특별히 내세울 만한 재산도 없었다. 그녀가 유일하게 잘하는 일은 씨앗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안은 어떤 벼알이 알차고 어떤 벼알이 벌레 먹었는지 알았다. 마른 땅에서도 견디는 콩 품종과 물이 많은 곳에서만 잘 자라는 품종을 구별할 수 있었다. 옥수수 씨앗을 얼마나 말려야 하는지, 다음 계절에도 싹을 틔울 수 있도록 항아리에 어떻게 보관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 것들은 아버지에게 배운 것이었다. 아버지는 씨앗 하나는 오늘의 양식일 뿐 아니라 내일과 맺는 약속이라고 말하곤 했다.
마룻바닥 아래의 항아리
그해 흉년이 든 뒤, 마을의 많은 가정은 아직 팔 수 있는 것들을 내다 팔았다. 어떤 이는 물소를 팔고, 어떤 이는 놋냄비를 팔았으며, 어떤 이는 아이를 데리고 일자리를 찾으러 읍내로 갔다. 초라한 식사 자리에서 사람들은 모두 떠날 일을 이야기했다. 강물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다음 계절에 농사를 지을 생각을 하는 사람은 더더욱 없었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가 묽은 죽을 끓이고 있을 때 안은 등잔을 들고 낡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집 한구석을 받치고 있던 널빤지를 들어 올린 뒤 그 아래의 부드러운 흙을 파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의 손이 작은 항아리의 아가리에 닿았다. 그 항아리는 아버지가 여러 해 전에 묻어 둔 것이었고, 안에는 빛이 바랜 천 주머니들이 들어 있었다.
안은 주머니를 하나씩 열었다. 갈색을 띤 누런 벼알과 녹두, 조, 그리고 약간의 호박씨가 나왔다. 양은 많지 않았지만 모두 마르고 알차며 온전했다. 안은 항아리 곁에 아주 오래 앉아 부엌에서 장작 타는 소리를 들으며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는 내일을 시작하게 해 줄 것을 남겨 두거라.”
안의 어머니는 씨앗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딸이 무엇을 하려는지는 알았지만, 가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씨앗을 뿌리면 마른 땅에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대로 남겨 두면 두 모녀가 며칠 동안 먹을 양식이 더 생겼다. 결국 어머니는 이렇게만 말했다.
“네가 결정했다면 그 결정에 대한 책임도 네가 지거라.”
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씨앗의 일부를 작은 주머니들에 나누어 담아 집 안 여러 곳에 숨겼다. 나머지는 항아리 안에 그대로 두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소문이 퍼지면 마지막 남은 씨앗들이 너무 잘게 나뉘어 밭 한 이랑에도 충분히 뿌리지 못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상인의 제안
며칠 뒤, 읍내에서 온 상인 한 명이 바이맛 마을에 나타났다. 그는 쌀과 식수가 가득 실린 손수레를 끌고 왔다. 상인은 아직 남아 있는 씨앗이라면 무엇이든 아주 비싼 값에 사겠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집에 남은 마지막 씨앗 한 줌씩을 가져왔다. 당장 며칠을 버티려면 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상인은 안이 씨앗을 알아볼 줄 안다는 말을 듣고 그녀의 집을 찾아왔다. 그는 흰쌀 한 자루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안이 보관 중인 씨앗을 전부 넘기면 물 한 항아리를 더 주겠다고 말했다. 두 모녀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여러 주 동안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양이었다.
안은 쌀자루를 바라보았다. 어머니와 묽은 죽으로 끼니를 때우던 날들, 날이 갈수록 야위어 가는 어머니의 어깨가 떠올랐다. 동시에 집 뒤편의 갈라진 논도 생각났다. 씨앗을 팔면 적어도 두 모녀는 한동안 굶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하지만 항아리의 물이 바닥나고 쌀자루가 비어 가면, 그들에게 무엇이 남을까?
안은 상인에게 물었다.
“씨앗을 사서 어디에 심으실 건가요?”
상인은 웃으며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씨앗은 상품이고, 가장 높은 값을 치른 사람이 소유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안은 논쟁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저으며 쌀자루를 상인 쪽으로 밀어 돌려보냈다.
“팔지 않겠어요.” 안이 말했다.
상인은 화를 내며 안이 너무 오만하다고 여겼다. 그는 마을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두가 굶주리는 동안 그 소녀가 자기 몫을 숨기고 있다고 떠들었다. 소문은 마른 들판의 바람보다 빠르게 퍼졌다. 몇몇 사람들은 안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씨앗을 당장 마을 전체에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첫 번째 밭이랑
안은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굶주림과 갈증이 사람들로 하여금 오늘만 바라보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도 씨앗을 자기 혼자 간직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서둘러 공평하게 나누는 것만으로는 수확을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그래서 아직 힘이 남아 있는 사람들을 찾아 마른 강바닥 가까이, 가장 낮은 곳에 밭이랑 하나를 파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안의 어머니만 와서 도왔다. 그다음에는 록이라는 소년이 아버지의 작은 괭이를 들고 왔다. 이어 평생 농사를 지어 온 맏이라는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와 한 방울의 물이라도 가둘 수 있도록 둑을 쌓는 법을 알려 주었다. 세 사람이 모였다가 다섯 사람이 되었고, 마침내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함께하게 되었다. 그들은 마른 나뭇가지를 이용해 땅을 덮고, 작은 도랑을 파서 강바닥에 남아 있던 깊은 웅덩이의 물을 끌어왔다.
안은 씨앗을 여러 몫으로 나누었다. 각자에게 한 줌씩 나누어 집으로 가져가게 하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공동 밭에 씨앗을 뿌렸다. 집집마다 번갈아 가며 밭을 돌보았다. 부엌 재가 있는 사람은 재를 가져왔다. 썩은 잎을 구한 사람은 나뭇가지 밑에 깔아 주었다. 이런 작은 일들은 처음에는 많은 사람을 어색하게 했다. 저마다 자기 집만 돌보는 데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뭄 속에서는 한 사람이 밭 전체를 위해 물을 지키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위해 물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들은 곧 깨달았다.
처음 며칠 동안 땅에는 아무런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씨앗은 얇은 흙 아래 가만히 누워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인내심을 잃기 시작했다. 그들은 안이 귀한 씨앗을 죽은 땅에 내던졌다고 말했다. 안 역시 때로는 불안했다. 그녀는 매일 밤 논가로 나가 몸을 숙여 흙을 만졌다. 마치 땅속에서 무언가 들을 수 있기라도 한 듯이.
열흘째 되는 날 아침, 록이 마을 곳곳을 뛰어다니며 소식을 알렸다. 밭이랑 가장자리에 작은 초록 싹 하나가 솟아났다는 것이었다. 이어 두 번째 싹, 세 번째 싹이 올라왔다. 누가 먼저 환호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잠시 뒤 근처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그들은 뜨거운 바람 속에서 가늘게 흔들리는 여린 새싹들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울음을 터뜨렸고, 누군가는 말없이 머리에 두른 수건을 벗어 얼굴을 닦았다.
되살아난 한 계절
첫 번째 밭이랑에서는 많은 수확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바이맛 마을에 식량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안겨 주었다. 땅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믿음이었다. 남은 씨앗으로 마을 사람들은 낮은 곳의 땅에 계속해서 씨를 뿌렸다. 얕은 우물을 파고, 햇볕을 가릴 발을 세웠으며, 밤에는 사람들이 번갈아 물을 지켰다.
상인은 몇 주 뒤 다시 돌아왔다. 그는 마른 강가에 푸른빛이 나타난 것을 보고 놀랐다. 상인은 새로 난 채소와 씨앗을 전부 사겠다고 제안했지만, 이번에는 마을 사람들이 함께 거절했다. 그들은 남는 것만 팔고, 씨앗으로 쓸 것은 각 가정의 표시가 적힌 항아리에 따로 보관했다.
안은 마을의 우두머리가 되지 않았다. 그녀 자신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안은 그저 씨앗을 보관하는 법, 물을 나누는 법, 다음 계절을 위해 수확물의 일부를 남겨 두는 법을 사람들이 기억하도록 도왔다. 한때 사소한 것으로 여겨졌던 지식은 점차 공동의 재산이 되었다. 마을 아이들은 좋은 씨앗을 알아보는 법을 배웠다. 어른들은 버려두었던 둑을 다시 손보기 시작했다.
그해 말, 몇 달 동안 맑기만 하던 하늘에 구름이 몰려왔다. 첫비는 어느 날 오후에 내렸다. 세차지는 않았지만 흙먼지에서 따뜻하고 진한 냄새가 올라오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을 사람들은 처마 밑에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바닥을 따라 첫 물줄기가 흐르자 록은 목이 쉴 때까지 웃으며 강둑을 따라 달렸다.
안의 어머니는 딸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옳았다고 말했다. 씨앗 하나는 정말로 내일과 맺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그 약속은 충분히 오래 지켜 내고, 믿음을 가지고 땅에 심는 사람이 있을 때에만 현실이 된다고 했다.
몇 년이 지난 뒤에도 바이맛 마을에는 가뭄이 찾아왔다. 강은 때때로 다시 모래 띠로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도 한 번의 건기가 미래 전체를 앗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집집마다 씨앗 항아리 하나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내일의 항아리’라고 불렀다.
안은 강가를 지날 때마다 여전히 몸을 숙여 바람에 날려 땅 위에 떨어진 작은 식물 씨앗들을 주웠다. 그녀는 그것들을 집으로 가져가 말린 뒤 천 주머니에 넣어 마을 아이들에게 건넸다. 그리고 모든 씨앗이 싹을 틔우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씨 뿌리기를 멈추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때로 한 마을을 구하는 것은 가득 찬 식량 창고도, 큰 강도, 때맞춰 나타난 영웅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필요한 것을 남겨 둘 줄 알고, 적절한 때에 나눌 줄 알며, 오늘의 두려움이 내일의 모습을 결정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 평범한 한 사람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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